'천만 관객' 모아야 하는 이 영화... 실망인데
[리뷰] 7년 만에 돌아온 강제규 신작영화 <마이 웨이>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가 7년 만에 돌아왔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감독의 길에 들어선 강제규는 1999년 <쉬리>로 한국 영화사를 다시 쓰게 하였다. 전국 관객 618만을 돌파한 흥행작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설정과 짜임새도 탄탄하여 그는 충무로 대표감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남북분단과 사랑이라는 처연함과 안타까움! 

영화 '마이웨이' @ 디렉터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강제규는 언론의 주목을 다시 받게 된다. 1174만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이른바 천만관객 신화의 중심에 서게 된 강제규. 그 후로 그에게는 '흥행의 귀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미국에서도 <형제애 Brotherhood>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고,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부문 후보작으로 출품되었다. 

천만관객 신화는 2003년 <실미도>의 1100만으로 시작되어, <태극기 휘날리며>를 거쳐 <왕의 남자>(1230만, 2005년)와 <괴물>(1300만, 2006년), 그리고 <해운대>(1130만, 2009년)로 이어져오고 있다. 강제규는 <마이 웨이>를 가지고 다시 천만관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이 웨이>의 손익분기점이 1000만이기 때문이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준식 : 영화의 중심, 그러나 설득력은...

영화 '마이웨이' 주인공 준식(장동건 분) @ 디렉터스

<마이 웨이>에서 이야기를 끄는 힘은 마라톤이다. 영화의 주인공 준식(장동건 분)과 타츠오(오다기리 조 분)가 마라톤으로 질긴 인연을 맺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잘했던 두 사람이 달리기로 만나서 마라톤으로 대단원을 맞이하는 영화 <마이 웨이>. 따라서 영화 제목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내가 선택하여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 운명처럼 대면하는 길. 

준식은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으로 조선민중의 한을 달래주었던 손기정처럼 마라톤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달린다. 달리는 것만이 그의 삶의 원인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처럼 준식은 달린다. 한겨울 혹한 속에서도 뙤약볕 모래사장에서도 그는 달린다. 그의 달리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맹목성이 있다.  

"여기서 경성까지 달리면 얼마나 걸릴까. 1년쯤 걸리겠지." 

노르망디 바닷물 속에서 준식이 타츠오에게 던지고 답한 말이다. 그런데 1년씩이나 걸릴 것 같지 않다. 노르망디에서 경성까지 1만2000km. 1년 365일. 나누면 하루에 33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거리. 그들처럼 젊고 잘 달리는 청년들이라면 8개월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준식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는 달려서 경성으로 돌아왔을까.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준식의 영웅성에 대해 공감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준식의 행동에 의아해 하거나 더러 분노한다. 아버지와 조선의 적이며, 극악무도한 일제의 충실한 장교 하세가와 타츠오에게 어째서 나라 뺏긴 조선청년 준식이 그토록 도저한 인간애를 보여줘야 하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감독과 관객의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종대 : 민족주의 혹은 출세주의의 경계에서 

<마이 웨이>에서 객석과 가장 폭 넓고 깊이 있게 교감하는 인물은 종대(김인권 분)다. 그의 솔직함과 직선적인 성격, 그리고 설득력 있는 상황설정 때문이다. 준식의 여동생 은수를 연모하는 종대는 그림자처럼 준식과 동행한다. 언제나 준식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은수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미래가 있다. 그러나 운명이란 게 어디 호락호락한가!

영화는 경성에서 출발하여 소련-몽골 국경을 거쳐 독일군과 소련군이 대치하는 유럽-러시아 전선을 지나 노르망디에 이르는 1만2000km의 여정을 보여준다. 일상화된 죽음을 동반한 여정에서 관객은 세 차례에 걸친 거대한 전쟁장면을 확인한다. 장대한 규모의 장면을 기막힌 카메라워크와 눈부신 컴퓨터 그래픽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잡아낸다.  

영화는 할리우드 스타일 관객에게 제격이다. 거기서 준식은 주역이 아니라 조연으로 전락한다. 외려 종대와 타츠오가 최전방에서 영화를 인도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치열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내지 애국주의가 강력하게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러 걸음 물러서있는 듯 보이는 준식의 캐릭터는 아주 희미하다. 

종대는 소련군 포로가 된 다음 입체적이고 전천후적인 인물로 변신한다. 순박한 식민지 조선 청년에서 민족적 자각과 자의식이 충만한 인물이 된다. 소련군에 앞장서 충성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는 욕망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는 친구들과 등을 돌리고서라도 출세와 성공을 염원하는 불같은 욕망의 노예가 된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은수를 잊지 못한다. 이렇게 종대는 <마이 웨이>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한 인물로 살아난다.  

타츠오와 쉬라이 : 변화하는 일본청년과 차돌 같은 중국처녀  

영화 '마이웨이' 여자 저격수 쉬라이(판빙빙 분) @ 디렉터스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요소는 언어일 것이다. 제목은 그렇다 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대사가 일본어로 진행된다.

한국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보면서도 자막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욱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준식보다 그의 일본인 경쟁자 타츠오의 캐릭터가 훨씬 다채롭고 용량도 크다.

준식은 성장이나 변화가 멈춘 정지된 인물이다. 이에 반하여 타츠오는 어릴 적에는 반항기로 넘쳐나기도 하고, 나이 들어서는 전쟁광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도 한다. 죽음에 직면한 자신을 구하려는 준식에게 고마움을 절절하게 전달하려는 면모도 보여준다.
 
노르망디에서는 끝까지 준식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헌신적인 자세도 내비친다.


타츠오의 변신과 비교하면 준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물화의 인물로 고요하게 멈춰 서있다. 성공적인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 창조라고 한다면, 준식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이런 면은 쉬라이(판빙빙 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고지전>에 등장하는 여성 저격수 태경을 연상시킨다. 백발백중에 미모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저격수 쉬라이를 움직이는 힘은 일본군에게 당한 능욕과 복수를 향한 뜨거운 염원이다. 전쟁광처럼 죽음마저 불사하는 쉬라이의 형상은 우리가 도저히 다가가기 힘든 거리를 느끼게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쉬라이를 편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난다. 따라서 그녀는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롭게 되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중일 관객들의 시선 : 21세기 세계와 개인, 그리고 국가

 <마이 웨이>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몇몇 국지전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겪은 지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보내면서 현대인은 전쟁과 국가, 그리고 민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에 대한 한중일 세 나라 관객의 반응 역시 적잖게 궁금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일제가 일으킨 대동아전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경험을 가진 한국인과 중국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중국인들은 쉬라이에게 얼마나 동조할까. 타츠오가 보여주는 천황과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과도한 국가주의 혹은 일본인 특유의 민족주의에 대해 현대의 일본 청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알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강제규 감독의 머릿속에서 어떤 사유와 계산으로 이루어졌는지, 그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대목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정부와 천황가문, 극우 민족주의 내지 국가주의 세력의 존재를 생각하면 <마이 웨이>는 불편하고 우려되는 영화다. 그런 까닭에 영화는 그만큼 선진적이고 진취적이기도 하다. 

영화의 인도적이고 선진적인 지점에서 문제는 시작한다. 2011년 12월 14일 1000회를 맞이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반성과 사죄를 모르는 전쟁 범죄자들의 능청과 허세 또한 지속되고 있다. 진정한 사죄와 참회가 전제되지 않는 용서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용서가 필요 없다는 자들에게 무슨 용서를 한단 말인가. 이런 점이 목에 걸린 날카로운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의미 있는 판단, 관객에게 달렸다

영화 '마이 웨이'의 한 장면 ⓒ 디렉터스

<마이 웨이>는 여러 논쟁과 화제를 만들면서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천만관객 신화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중일 삼국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등장하여 연기대결을 벌이고, 영화의 소재가 일본 제국주의가 야기한 조선침탈과 남경대학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과 노르망디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 그지없다. 

'1944년, 노르망디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마이 웨이>' 

포스터 구절처럼 강제규는 상상력과 장인정신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영화를 다각도로 접근하고, 올바르게 평가하는 일이 우리 몫으로 남았다. 관객숫자가 아니라, 의미 있는 관점과 판단력을 가지고 <마이 웨이>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의 길을 고집스레 달렸던 준식의 인생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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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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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성과 사죄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리뷰] 미야자키 하야오 각본 영화 <코쿠리코 언덕에서>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높고 정갈한 이마가 조금 튀어나온 처녀애가 깃발을 올리고 있다. 두 갈래로 아무렇게나 쑥쑥 땋아 내린 머리채와 분홍빛 얼굴색이 처녀애의 맑은 눈동자와 어우러져 앳된 표정이다. 열여섯 살 고등학교 2학년생 '우미'다. 우미가 입고 있는 푸른색 원피스 허리춤에는 몇 갈래 장식이 달려 있다. 우미의 원경으로 푸른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다. 

우미가 향하는 깃대의 끄트머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총각애가 뱃전에 서있다. 멀리 있어서 얼굴 윤곽은 불확실하지만 두 눈과 입매는 선명하다. 고집스러움과 단호함이 읽힌다. 누군가 기관실에서 배를 운항하고, 총각아이는 선착장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뭍으로 다가오고 있다. 열일곱 살 고3 '슌'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포스터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미는 분명 깃발을 올리고 있는데, 깃발은 슌이 타고 있는 배 위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슌은 먼 곳 육지를 바라본다. 우미는 우미대로 깃발이 아니라 저 높은 깃대 끄트머리를 쳐다본다. 따라서 깃발은 두 사람과 무관하게 나름의 존재의의를 가지고 바람에 몸을 맡긴다. 

풋풋한 청춘의 첫사랑

스튜디오 지브리



'첫사랑'이란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는가. 어설픈 입맞춤인가 가슴 먹먹해지는 향수인가. 그도 아니면 말 못할 마음으로 헤어져야 했던 이별 장면인가. 누구에게나 남모르는 아릿한 추억은 있는 법.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허 생원에게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다. 죽어서도 차마 잊을 수 없는 성 서방네 어여쁜 처녀가 있지 아니한가. 

<인연>에서 피천득은 어떤가. 아사코와 함께했던 어느 젊은 날 추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던 그이의 담담한 서정은 얼마나 향기롭고 훈훈한 것이었는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결코 망각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연은 곳곳에 있다. 그런 까닭에 오늘밤에도 누군가는 한 잔 술을 기울이며 빛바래고 낡은 추억의 창고로 잠복해 들어가는 것이다. 

1963년 요코하마에서 펼쳐지는 우미와 슌의 처연하도록 투명한 첫사랑 이야기가 <코쿠리코 언덕에서> 기둥 줄거리다.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성숙했던 그 시절 청춘의 내면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는 영화.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대학입시나 부모의 반대 혹은 학교의 엄격한 규율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인연과 관계란 사실이 흥미롭다.   

슌이 내뱉듯 털어놓는 그들 관계의 배후에는 '막장드라마' 같은 견고한 인계철선이 가로놓여 있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간관계와 질긴 인연의 은산철벽. 영화는 이 지점을 너무 가볍게 넘어서버려 감동의 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흠결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전하는 첫사랑의 아픈 여운이 여기에서는 증발하고 있다는 얘기. 

1963년 일본 그리고 청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아버지 하야오가 각본과 기획, 아들 고로가 감독을 맡은 미야자키 부자의 공동 작품이다. 하야오가 각본을 맡았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1941년 생으로 전후일본과 그 이후의 변화를 잘 기억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배운 사람과 간접적으로 배운 사람의 인식과 세계관에는 건너뛰기 힘든 거리가 자리하는 까닭이다.

동경올림픽을 1년 앞둔 일본에 신건설의 파도가 몰아닥친다. 우미와 슌의 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낡은 것을 부숴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절. 학교의 오래된 동아리 건물 '카르티에 라탱'이 희생양으로 떠오른다. 철학, 문학, 과학, 신문 동아리가 한데 얽혀 거대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카르티에 라탱'.  

'카르티에 라탱' 철거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그 와중에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우미와 슌. 낡았지만 소중한 건물을 보존하려는 그들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사랑의 매개에는 공동의 접점이나 공공의 적이 있기 마련이므로.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청년들의 생동감과 높은 참여의식이다. 

중요문제를 두고 충돌하는 청춘들의 함성과 대결은 얼마나 힘차고 역동적인가. 그런 힘을 바탕으로 일본은 1969년 이후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지위를 40년 넘도록 유지했다. 오늘날 '캥거루족'으로 불리는 일본 청년들의 자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불과 50년, 두 세대 만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며 의욕상실에 빠진 애늙은이들의 나라가 된 일본. 

영화 속 한국전쟁이 불편하다?! 

지브리스튜디오


우미가 슌에게 다가갈수록 슌은 우미에게 거리를 둔다. 때로는 면전에서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 우미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슌을 둘러싼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출생의 비밀. 해맑은 일본 청춘들의 사랑을 헤살 놓는 장본인은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이다. 영화에서 우리는 세 차례나 '조선전쟁'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전 당시 수십만 인민지원군과 함께 해군도 북한에 파견하였다. 이렇게 보면 일본을 보급기지로 활용했던 미국의 지시와 자국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일본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후부흥을 위한 막대한 자금과 물자가 절실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그것이 세상과 자연의 근본이치. 꽃이 져야 비로소 열매가 맺히지 않는가. 전쟁 와중에 슌과 우미의 아버지 세대 가운데 한 사람이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두 사람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꼬이고 얽혀버리는 것이다. 나는 영화 속 한국전쟁 이야기에 불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관객을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모티프로 차용되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함의도 없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거기서 발원하는 인간관계의 처연한 얽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련하고 달콤한 사랑과 성장영화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잡아내는 관객들이 나는 두렵다. <청연>을 둘러싼 친일논란이 그랬듯 찻잔의 바람이 되었으면 한다.  

모든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스튜디오 지브리


아무리 괴로웠던 일이라도 시간과 함께 망각의 속에서 탈색된다. 거기 무지개색이 덧씌워져 아름답고 화려한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한국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에 몰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가슴 깊은 곳에 첫사랑의 아픔을 꼭꼭 묻어두고 간간이 들춰보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 이제는 모든 게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한 사람의 악당도 없는 천진난만한 동화의 세계다. 우미와 슌의 고등학교 이사장은 어떤가. 사업의 성공에 몰두하면서도 그는 학생면담을 받아들이고, '카르티에 라탱'을 몸소 시찰하러 온다. 학생들을 훈계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감동을 받는 그는 이미 한물간 낡은 세대의 인물이 아니라, 새 시대 주역처럼 청신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극적인 사건과 꼬일 대로 꼬인 인간심성과 영혼에 익숙한 한국관객들은 아쉬운 얼굴이 역력하다. 관객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술술 풀려나가는 영화가 적잖게 못마땅한 눈치다. 오히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영원히 사라져버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의 시공간과 사람들! 

영화가 끝난 뒤 

각본을 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고유한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것보다는 세계적인 것을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해왔다. 하지만 <코쿠리코 언덕에서>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세계와 확연히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으로 인한 대량살상의 비극,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 문제와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에 이르기까지. 

올해로 고희를 맞은 하야오의 심중에 자리하고 있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가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영화 <코쿠리코 언덕에서>. 그래선지 영화는 시종일관 활기와 인간다움, 미래를 향한 지향과 용기로 가득 차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끈기가 요코하마 항구의 오랜 풍경과 훈훈한 인정과 결합하여 기막힌 서정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딱 한 가지만 생각하자.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정기시위'가 어느덧 1000회에 가까워지고 있다.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시위가 오는 12월 14일 1000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넘쳐났던 일본이 왜 지금까지 진심으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영화 뒤끝이 복잡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일본이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게 일본의 시각이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돈에 묻힌 채 사라져간 종군위안부 문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미화되는 일본의 과거는 등장인물과 무관하게 따로 노는 포스터 깃발처럼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이제라도 일본은 반성과 사죄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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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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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악수를 하는 순간, 당신은 죽는다
[리뷰]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영화 <컨테이젼>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영화 <컨테이젼>이 지난 22일 개봉했다. 그는 첫 번째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1989)로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1998년에는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액션을 선보였다. <트래픽>과 <에린 브로코비치>(2000)는 사회문제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소더버그는 <오션스> 시리즈로 대표되는 오락영화와 <솔라리스>(2002)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도 명함을 내밀었다. 2004년에는 홍콩의 왕가위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니 감독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를 감독했다. 지금까지 그가 연출한 25편의 영화장르는 드라마, 범죄, 스릴러, 공상과학, 희극, 액션,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영화 '컨테이젼'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개인과 가족, 그리고 국가

홍콩으로 출장을 다녀온 베스(기네스 팰트로)가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키고 사망한다. 아주 짧은 시간 뒤에 베스의 아들 또한 같은 증상을 보이고 죽는다. 이런 사태에 직면한 베스의 남편 미치(맷 데이먼)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컨테이젼>은 이렇게 가족 이야기를 전반부에 배치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전체적인 서사구조를 준비한다. 

미치는 아내와 아들의 급작스런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고 싶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 미치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보건 당국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르는 일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여기서 영화는 무력한 시민이 일점혈육 딸아이를 보호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일상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가정의 출발은 아내와 남편이고, 그 외연이 확장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들과 딸이다.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의 조합에서 출발하여 대물림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컨테이젼>은 가정이 얼마나 신속하게 파괴되어 폭동에까지 이르는지를 확연히 재현한다. 허다한 사람들의 죽음과 가정파괴의 원인은 영화 끝에서야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가족이 모여 지역사회가 되고, 지역의 결합으로 국가가 만들어진다. 가족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로 연결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국가가 가족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당연지사. 신속한 감염으로 발생하는 위기를 국가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보고가 영화의 핵심적인 전갈이다. 

개인과 언론, 그리고 국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사실 보도의무가 서로 충돌한다면 여러분은 누구 손을 들어주겠는가. 2009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 장자연 사건'의 내막을 여러분은 상세하게 알고 있는가! 전도유망한 배우 장자연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는가. 그녀가 남긴 '성상납목록'의 인간들에 대한 검찰의 전면적인 조사는 이뤄졌는가. 

장자연과 관련됐다고 보도된 언론사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에 최선을 다했는가. <컨테이젼>은 이런 복합적인 문제에도 시선을 던진다. 여기서 핵심적인 인물은 주드 로가 연기한 크럼위드다. 크럼위드는 개인 블로그 운영자이자 의학 관련 프리랜서다. 그는 세계 전역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한 명확한 판단기준과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

영화 '컨테이젼'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크럼위드는 질병통제센터와 제약회사가 언론과 한통속이 되어 전염병 감염경로와 치료제 개발과정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기존의 종이언론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는 블로그에서 그 같은 생각을 밝히고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블로그 방문객은 날로 증가한다. 크럼위드는 자신이 개발한 '개나리 치료제' 선전에도 앞뒤 가리지 않는다.  

정의로운 인간을 자처하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국가와 언론과 제약회사의 은밀한 결탁관계를 폭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개발한 치료제 효능을 주식 투기꾼에게 확신시켜 이득을 챙긴다. 우리는 국가 공권력과 개인의 일치점과 차이점을 생각하게 된다. 치명적인 파국에 직면한 국민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게 초미의 문제다. 

당신의 손은 안전한가 

<컨테이젼>은 충격적인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허다한 물건과 악수 같은 일상적인 습관이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컨테이젼(contagion)은 '접촉감염'이나 '전염병'을 뜻하는 영어 어휘다. 따라서 접촉으로 생겨난 질병이 대규모 전염병으로 확산된다는 의미를 영화 제목은 함축하고 있다.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얼굴을 만지는가. 놀라지 마시라. 3000번 이상이라는 게 알려진 통계수치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1분에 4~5회 얼굴을 만진다고 한다. 하루는 1440분이고, 거기서 8시간 수면시간을 빼면 960분이 깨어있는 시간이다. 고로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하루에 3000번 이상 얼굴을 만진다는 통계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이는 수치다.  

문제는 얼굴이 아니라 손이다. 당신 얼굴을 만지는 손이 그 전에 무엇을 건드리고 무엇을 만졌는가, 하는 게 문제라는 얘기다. 엘리베이터 개폐단추, 공동주택 출입구의 문고리, 버스와 전철의 지지대와 손잡이, 대중음식점의 컵과 휴대전화기, 컴퓨터 자판과 자동차 운전대,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악수와 포옹. 인간의 접촉은 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무수한 접촉에 의지해 살아간다. 인간의 손은 영장류 가운데 최고도로 발전된 기능성의 총화다. 엄지손가락 재생 분야에서 인간은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만큼 인간의 손은 오랜 세월 축적된 진화의 결정적인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손은 오늘날 인간을 진화의 사다리 꼭짓점에 있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하나다. 손을 당신의 일상에서 제외하라. 그러면 무엇이 남게 되는가?

세상에 우연은 없다?

 

영화 '컨테이젼'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컨테이젼>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염경로를 구체화한다. 짧은 시간에 재현되는 경로는 충격적일 만큼 단순하다. 박쥐와 돼지, 인간이 상호 교차하는 아주 작고 우연적인 지점에서 발생하여 세계적인 규모의 대량살상으로 확산되는 원인이 규명될 때 객석은 잠시 숨을 죽인다. 어떤 이는 어처구니없어 하고,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개체에서 발생하는 우연적인 사건이 거대한 유기체에서 필연을 야기한다."    

프랑스 출신 생화학자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설파한 내용의 핵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에 기초한 필연의 사슬에 엮여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명과 순환을 설파한 김지하의 '밥은 하늘이고, 똥은 밥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돌아서 원인 제공자에게 돌아온다는 생각. 불가의 '회자정리'와 같은 맥락이다. 

홍콩에서 만난 업자와 희희낙락하던 베스가 음식점 주방장과 손을 맞잡는다. 주방장의 손은 청결하지 않다. 베스의 손이 닿은 컵을 웨이터가 만지고, 그의 손은 애인과 겹쳐져 죽음으로 이어진다. 베스의 외도가 시카고에서 또 다른 죽음을 부르고, 그것은 아들의 죽음과 맞닿는다. 그런데 미치는 괜찮을까. 그것은 여러분이 영화관에서 몸소 확인하시라. 

속도와 감시의 시간대 21세기

 <컨테이젼>은 21세기 세계의 속도와 관계망을 사유한다. 1918년 에스파냐 독감으로 유럽에서 최소 5000만, 많게는 8000만까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느림이 지배한 시기였다. 자동차와 비행기와 고속철이 누비는 21세기는 그야말로 광속의 시간대다. 20년 남짓 진행된 거침없는 세계화의 물결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다! 

누구도 과학과 기술이 몰고 온 광기의 속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 의학, 통신은 발달했지만 인류가 지구 전역을 빠르게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험도는 한층 높아졌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전염 병원체는 끝없이 진화하면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와 함께 <컨테이젼>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 인간들이 겪는 극한의 공포를 보여준다. 

영화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소더버그가 영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속도와 세계화의 문제, 언론의 구실, 국가기밀과 그것과 결부한 사생활 문제, 폭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누군가는 질병으로 죽어나가지만 누군가는 그 대가로 돈을 버는 현실, 초국적 제약회사와 무력한 민중,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대립과 반목...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자꾸 우리의 현실이 겹쳐진다. 그리고 물음표가 연신 생겨나는 것이다. 저런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 것인가. 덧붙여 베스가 홍콩에서 경험한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카메라(CCTV)에 찍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당신의 하루하루는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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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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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ck de madeira 2011/12/22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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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녀'와 중년남의 원조교제? 공감은 좀...
[리뷰] 송강호와 신세경의 합작영화 <푸른 소금>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영화 푸른소금

1992년 <그대 안의 블루>로 데뷔해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1995)와 <시월애>(2000) 등으로 존재감을 알려온 이현승 감독.

그는 로맨스와 드라마가 결합한 영화에 강점을 보이면서 나름의 영상미학을 선보이는 중견 감독이다. 앞의 두 영화는 일과 사랑이 병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물으며, <시월애>는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사회문제나 인간의식 혹은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은 그의 영화와 무관하다. 반면에 소소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그늘이나 그림자를 탁월하게 잡아내고, 고도의 상상력으로 상큼한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는 적잖게 성공한다.

그런 작업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 나름의 영상미가 동행한다. 그곳이 도회지 한복판이든 외딴 바닷가든. 

인생에는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인생에 중요한 세 가지 금이 무엇인가." 소금과 황금(혹은 백금)은 금방 떠올릴 수 있다. 마지막 남은 '금'은 무엇인가. <퀴즈 대한민국>에 익숙한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술렁댄다. 나름대로 해답을 찾느라 영화관이 잠시 소란해진다.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금방 나오지 않는다. 

나는 '손금'이라고 혼잣말한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운명을 가늠하는 손금만큼 소중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사주팔자나 관상 혹은 족상이라고 주장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비슷한 맥락이고 친척관계다. 해답은 영화관에서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푸른 소금>은 이런 뜬금없는 가벼운 질문과 엉뚱한 답으로 객석을 웃긴다. 

영화가 버무린 여러 요소는 더러 강렬하게 충돌하고 더러는 어설프게 화해한다. 복합적인 조직폭력배의 거물이자 후계자가 될 사람이 요리학원에 다니는 설정도 특이하다. 더욱이 그는 감상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인물이다.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서 온종일 고독을 씹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과 쓸쓸한 표정으로 어디 먼 곳을 응시한다. 멋지다! 

복잡한 내면풍경의 사내를 감시하면서 밥값을 챙기는 여자. 그녀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격 선수였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가 가진 정보는 없다. 친구인 은정과 함께 돈 때문에 부산 조폭 해운대파에게 꼼짝달싹 못하게 묶인 신세라는 것을 빼고는. 오토바이에 가죽재킷과 헬맷을 장착한 '차도녀'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이미지는 너무 가냘프다. 

요리를 배우는 조직폭력배

 중년사내가 요리학원에서 열심히 강습을 받는다. 폭력조직 칠각파를 결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며, 보스가 세상을 뜨자 후계자로 급부상한 두헌(송강호)이다. 뭔가 앞뒤가 어긋난다는 느낌이다. 조폭의 전직 중간보스가 요리를 배우고 식당을 차려 평범한 삶을 살아보리라는 설정이 생뚱맞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두헌 옆에서 날렵한 솜씨로 칼질을 해대고 맛나게 북어국을 끓여내는 청순한 여인 세빈(신세경). 언제나 표정 없는 얼굴과 밋밋한 목소리로 두헌을 대하는 세빈. 감정개입을 철저히 차단하려는 의도적인 몸짓과 표정이 선연하다. 세빈은 두헌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여 해운대파에게 넘긴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가 전설적인 조폭이었다고?!'

 성기게 엮인 두헌과 세빈이 어떤 관계를 이어나가는가 하는 문제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기본 얼개다. 따라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필연성과 설득력을 가지는가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관객이 최소한도로 동의한다면 제작비 건지기도 어려울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가 많다면 흥행작이 될 것이다.

 혼란스러운 공간과 영상

 황혼 무렵 바닷가 염전에 남녀가 마주 서 있다. 네모꼴로 잘 다듬어진 염전이 사뭇 정갈하다. 충격과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두헌과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서있는 세빈. 하얗다 못해 푸르른 색깔을 내보이는 염전의 서늘한 풍경이 그들과 동행한다. 두헌은 세빈이 자신을 향해 총을 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맺은 관계의 깊이 때문이다.

 이윽고 울려 퍼지는 총소리. 그리고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르며 들려오는 총성. 두헌의 건장한 육신이 푸른색 염전 속으로 그림처럼 푹, 쓰러진다. 멀리서 그들을 겨누는 장총. 거기에는 망원렌즈가 달려 있다. 장총을 향해 혹은 슬프고 혹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세빈. 그녀는 소음기도 없는 권총을 염전 속으로 힘껏 던져버린다. 

<푸른 소금>의 영상미학은 이렇게 전달된다. 영화는 서울과 부산의 최신식 고층건물과 광안대교 같은 첨단건축물이 발하는 도회의 모습을 다각도로 잡는다. 거기서 발원하는 인물들의 중첩된 관계도 어김없이 카메라앵글은 포착한다. 킬러 K(김민준)와 세빈, 두헌과 킬러들의 대결이나 조폭 내부의 싸움도 도시의 서늘한 풍경을 재연하는 데 일조한다. 

세빈이 찾는 바닷가 술집은 이채롭다. 2만 원이면 갖은 해물을 맘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공간.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서 하얀 포말을 토해내는 곳. 화려한 네온사인과 도회지 풍광이 완전히 바래버린 전근대의 공간. 흰머리 노파가 지배하는 낡은 공간. 이런 공간을 배회하는 세빈과 두헌. 공간과 영상에서도 영화는 적잖게 혼란스러움을 재연한다.  

오토바이와 권총에 눌려버린 신세경 

영화를 보면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밀라 요요비치와 <툼 레이더> 연작에 나오는 안젤리나 졸리, <레옹>에서 마틸다로 나오는 나탈리 포트만이 떠올랐다. <푸른 소금>의 신세경은 누구와 닮았을까. 차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성장할 거라고 신문에서 특필하는 그녀가 과연 그런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관객들은 송강호의 툭툭 던지는 대사 하나하나에 이내 웃음으로 반응한다.  

"아저씨, 나 좋아하지?"
"니가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왜 은정이 죽였어?"
"난 여자는 안 죽여." 

신세경의 대사는 무겁고 어눌하며 끊긴다. 감칠맛 없이 배역과 대사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다. 낯선 의상과 오토바이와 권총에 눌려버린 표정이 역력하다. 그래서다. 어쩐지 불안하고 어색한 까닭은. 객석의 반응은 자연스럽지도 흔쾌하지도 않다. 텔레비전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2009) 분위기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배우 신세경이 거기 있다.  

영화 푸른소금

반면에 송강호는 여유만만 희희낙락이다. 파면당한 국정원 요원 이한규를 연기한 <의형제>(2010)나 애욕 때문에 파멸하는 신부로 등장한 <박쥐>(2009)의 주연배우 송강호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푸른 소금>에서 한 호흡 쉬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착지근한 멜로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2004)에서 최민식이 잠시 쉬어갔던 것처럼. 

공감 얻기 어려운 '원조교제' 같은 영화  

송강호와 신세경의 호흡은 그런대로 잘 맞아 보인다. 묵직하고 든든한 송강호가 뒤를 받쳐줌으로써 어설프지만 풋풋한 신세경의 연기가 새삼 살아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자 힘이다. 기실 <푸른 소금>이 내세울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노련한 배우와 예쁜 여배우, 아름다운 영상과 약간의 액션이 동반된 영화. 

하지만 오늘도 적잖은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현승의 영화가 아니라, 신세대 스타 신세경과 영원한 배우 송강호를 보기 위해서다. 이런 스타시스템이 흥행에서는 분명 유효하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애꾸가 말하는 것처럼 '원조교제'는 공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막힌 영상미학이나 걸출한 배우만으로 좋은 영화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이와 따뜻한 시선을 담은 영화가 우리를 찾아왔으면 좋겠다. 여전히 우리는 허다한 인생과 시간과 공간과 사건을 다채롭게 이야기하는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드라마든, 멜로든, 에스에프(SF)든, 역사물이든, 만화영화든 간에.


※ 오마이뉴스 9월 11일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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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ck 2011/12/22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난 그냥이 게시물에 여기 당신이 가진 위대한 정보에 대한 큰 엄지손가락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빨리 귀하의 블로그에 돌아올 것이다.

머리 뛰어나지, 의리 있지... 너, 인간이니?
[리뷰]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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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할리우드도 고민은 있다. 참신한 소재가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고갈에 직면한 할리우드가 선택한 것이 프리퀄(prequel)과 리부트(reboot)다.  

속편의 시간적 배경이 원작영화의 시간적 배경보다 더 앞선 내용을 다룬 영화를 프리퀄이라 하는데, <배트맨 비긴스>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본보기다. 리부트는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며, 내년에 개봉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그 예다. 유명 연작영화를 꽃단장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노련한 판매 전략이다. 

1968년 <혹성탈출> 제1편을 시작으로 장정에 오른 <혹성탈출> 시리즈는 지난 2001년 팀 버튼의 제7편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 선보인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전편에 제시된 충격적인 결말의 원인을 제시하는 프리퀄 수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래 세계에서 인간이 침팬지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지극히 놀라운 설정.  

시저의 탄생과 성장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약회사의 잘 나가는 연구원 윌에게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찰스가 있다. 뛰어난 지식인이자 우아한 교양인이었던 아버지의 끝 모를 추락은 윌에게 말 못할 고통을 준다. 그는 몇 년째 기적의 치매 치료제 '큐어'를 준비한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목전에 두고 침팬지에게 투여한 치료제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고, 윌은 성공의 문턱까지 다가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성공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험 과정에서 얻게 된 침팬지 시저는 윌과 찰스에게 행복의 원천이 되어간다. 빛나는 눈의 시저는 놀라운 지적 능력과 민첩성을 가진 침팬지로 자라난다. 윌은 시저의 친구이자 아버지를 자처하면서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호기심 때문에 집밖에 나간 시저가 부딪친 살풍경한 인간의 거리.  

시저의 공간은 윌의 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방이고, 그 꼭대기에 창문이 있다.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는 시저. 평온하고 안락하며 변화 없는 이쪽과 크고 작은 시끌벅적한 사건으로 넘쳐나는 저쪽을 차단한 창문. 소통과 교류의 매개가 아니라 차단제로 기능했던 창문의 역할 변화가 몰고 온 파국. 

저항과 폭동 : 시저와 스파르타쿠스 

거리와 광장 같은 외부세계로 열려진 창을 통해 우리는 눈과 귀로 정보를 얻고 세상과 소통한다. 창문 없는 공간은 무덤이거나 악명 높은 교도소의 징벌방뿐이다. 시저가 창문을 넘어 세상과 소통할 때 그것은 새로운 탄생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펼쳐질 시간과 공간은 시저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공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인원 수용소에서 시저는 난생 처음 동종의 침팬지와 오랑우탄, 고릴라를 본다. 정체성의 혼란이 야기된다. 시저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이 시저와 다른 유인원을 구별하는 현저한 요소이기도 하다. 개체가 지나치게 눈에 띄면 다른 존재들에게 왕따 당하게 된다. 이지메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세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윌과 작별한 시저는 수용소에서 침팬지의 본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과 의식은 평균적인 인간의 수준을 넘어버렸고, 자신들을 학대하는 관리자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장면에서 창문이 다시 등장한다. 유인원들을 가둔 공간 꼭대기에 있던 돔 형태의 창문을 깨뜨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시저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 

영화를 보면서 스파르타쿠스가 떠올랐다. 고대 로마의 노예반란을 이끌었던 인물로 크라수스에게 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스파르타쿠스. 노예에게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이 있음을 내세우며 특권층만의 로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전설적인 혁명가. 그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어쩌면 오늘날의 유럽과 미국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연 혹은 본성에 대하여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만일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야수처럼 된다면 그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인면수심이나, 개돼지 같은, 짐승만도 못한 따위의 표현이 떠오를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 키워지고 길들여져 침팬지의 본성을 잃고 인간성을 획득한 시저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시저는 인간인가, 침팬지인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안 돼!" 

수의사 캐롤라인이 윌에게 몇 번이나 경고하는 말이다. 그녀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언젠가 시저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며, 침팬지의 본성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명해 보이는 말이 뜻밖의 상황과 충돌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로 인해 관객은 충격과 흥미의 늪으로 깊이 빨려든다.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문구는 따라서 적잖게 섬뜩하다.  

"진화는 인류를 위협하는 혁명이다!" 

공상과학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시저가 윌의 냉장고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강력한 치매 치료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유기체에게 주어진 자연 혹은 본성을 거스르는 단 한 번의 치료제가 불러오는 기적 같은 효과. 그렇다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 지겨운 공부를 하고 있는가! 

금문교 다리 위에서 

대규모 경찰병력과 유인원이 충돌하는 금문교 다리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시저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유인원 무리는 잘 조직된 군대나 전사들처럼 보인다. 그들을 막아선 가공할 경찰력을 뛰어난 두뇌회전과 전투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시저와 그 무리는 신세계로 질주하는 스파르타쿠스와 그를 추종하는 반란자들의 형상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시저가 고릴라에게 보여주는 연대의식이다. 자신을 괴롭힌 우두머리 침팬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활용했던 고릴라와 끝까지 함께하려는 시저의 '의리'는 인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편에는 치밀하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영리한 시저가, 다른 한편에는 연민과 동정을 온몸으로 실현하는 시저가 있다. 

영화에서 다리는 '창문'과 더불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처럼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금문교는 후자에 속한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유인원들의 신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자 입구로서의 다리.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의 다리.

 그러기에 윌이 시저를 끝까지 뒤쫓는 행위는 어리석어 보인다. 금문교를 건너 가버린 시저에게 윌은 더 이상 친구도 아버지도 될 수 없다. 이제 윌과 시저는 동종의 영장류이기는 하되, 영원히 적대의식으로 마주해야 하는 관계로 살아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간 시저가 윌에게 남긴 대사는 침팬지인 시저가 윌보다 더욱 진화했음을 뜻한다. 

"윌의 집은 여기야." 

침팬지는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략 500만 년 전부터 다른 길을 걸어온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5%가 동일하다고 한다. 오늘날 65억 명에 이르는 인류는 지구를 지배하는 최상위종이 되었다. 반면에 야생상태의 침팬지는 1만 5천 마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멸종위기를 맞은 침팬지가 진화의 사다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영화는 여러 면에서 경고음을 낸다. 과도한 욕망에 대한 경고가 있다.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윌이나, 그것으로 거액을 벌려는 제약회사 대표가 보여주는 욕망은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그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동물로 쓰이는 침팬지들의 가혹한 운명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모르모토처럼 인간을 위해 사용되기 전에 무수한 임상실험에 활용되는 무수한 동물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드킬로 죽어나간 동물사체를 먹을거리로 둔갑시키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사정은 더 참혹해 보인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21세기 인간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다움으로 표현되는 인간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가. 창밖에 매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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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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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쉴 틈 없는 재미가 가슴에 꽂히네 
[리뷰] 한국판 할리우드 흥행대작 <최종병기 활>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극락도 살인사건>(2007)으로 데뷔한 신예감독 김한민의 <최종병기 활>이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이미 개봉된 한국판 흥행대작인 <제7광구>나 <고지전>을 압도하면서 개봉 닷새 만에 13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740만 관객을 동원한 <써니>를 누르고 올해 한국영화 최다관객 동원도 가능해 보인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가능하다.  

<최종병기 활>은 요즘 유행하는 한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몇몇 스타로 이어진 한류열풍이 케이 팝으로 세계적인 화제다. 이 시점에서 90억 원을 투입한 전쟁영화가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긴박감과 속도감, 그리고 거듭되는 반전 
 

영화 '최종 병기 활'

 '영화는 1636년 병자호란과 개성, 압록강 일대를 시간과 공간 배경으로 설정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5년 뒤인 1623년 발생한 인조반정을 앞에 배치하여 등장 인물들과 역사적인 사건의 연관을 밝혀놓았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608-1623 재위)은 7년 동안 전국을 병화로 물들인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내치와 외교 면에서 큰 수완을 발휘하였다. 

반면에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여 사림의 분노와 원성을 자아낸다. 서인들은 청나라 전신인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그가 인조다. 인조는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멀리함으로써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을 불러온다. 

영화는 정묘호란을 뛰어넘고, 병자호란에서도 우리에게 친숙한 남한산성 전투나 '삼전도의 굴욕' 같은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날선 대립이나 남한산성을 둘러싼 조선과 청나라 병사들의 전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시종일관 긴박감과 속도감 그리고 거듭되는 반전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인조반정에서 광해군 편에 섰다가 몰락한 인물이 남이(박해일 분)와 자인(문채원 분)의 부친이다. 반역자로 몰려 죽으면서 그는 남이에게 누이동생 자인을 보살피라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끼던 활을 남이에게 넘겨준다. 멀리서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난 남이와 자인은 개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런 까닭에 남이는 잠시도 자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 13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어엿하게 장성한 남이와 자인. 반역자의 자식들을 길러준 집안의 아들 서군(김무열 분)은 자인에게 마음이 있다. 이렇게 <최종병기 활>은 남매와 연인이라는 틀로 세 사람의 주인공을 엮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 왕자 도르곤과 그를 수행하는 명궁 쥬신타(류승룡 분)와 정예부대 '니루'를 축으로 상대진영을 축조한다.  

영화의 사건은 직선궤도를 그리며, 사유나 숙고 혹은 반성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쾌속으로 진군한다. 누이를 보살피겠노라고 아버지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남이와 만주족의 기상과 형제애를 대표하는 쥬신타. 그들의 쫓고 쫓기는 추적이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 시위처럼 관객을 긴장시킨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끝난다.

<최종병기 활>에서 활과 함께 눈길을 끄는 소품이 있다. 자인과 서군의 혼례식 날 남이가 자인에게 준비한 신발이다. 꽃무늬가 예쁘게 새겨진 청록당혜. 댓돌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은 참 정갈하고 비할 데 없이 곱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신발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네 번이나 되풀이되는 신발의 등퇴장은 관객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어 맨다.  

조선 활과 육량시가 만났다, 결론은...

 바람에 휘날리는 너른 풀밭을 젊은 여인이 칼을 움켜쥔 채 달리고 있다. 쥬신타의 육량시로부터 오라버니를 구하려는 자인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남이와 쥬신타 그리고 자인이 일직선상에 자리한다. 쥬신타는 자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다시 바람이 분다. 마지막 남은 화살을 먹이면서 남이는 생각에 잠긴다.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 것이다.  

"두려움은 직시하면 되고,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남이의 활솜씨다. <고지전>에 등장하는 저격수 '이초'처럼 남이의 화살은 귀신처럼 적의 명줄을 꿰뚫는다. 그의 주특기는 바람을 이용해 휘어 날아가도록 화살을 날리는 곡사. 아주 짧은 시간에 표적을 정하고 과녁을 향해 순식간에 화살을 날리는 남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레골라스도 남이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쥬신타는 화살촉 무게만 240그램에 활 길이가 170cm에 달하는 육량시로 남이와 대적한다. 육량시는 순식간에 상대방의 팔다리를 잘라낼 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인 무기로 가공할 파괴력을 자랑한다. 때로는 말을 타고, 때로는 도보로, 때로는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남이와 쥬신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전개된다. 객석은 잠시 숨 돌릴 겨를조차 없다. 

활이 허공을 날 때마다 객석을 울리는 음향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북과 장구 같은 전통 타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음향은 박진감과 속도감 그리고 짜릿한 쾌감까지 선물한다. 이안의 대표적인 무협영화 <와호장룡>(2001)에서 용과 수련이 한밤중에 무예를 겨루면서 대결할 때 들려왔던 기막힌 북소리의 놀라운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 '최종 병기 활'

<최종병기 활>에 관객이 몰리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어렵고 까다로운 사극장르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영화는 속도와 재미에 집중한다. 광해군과 인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역사의식과 민족자주, 중국과 조선이라는 역사적 대립물을 가볍게 던져버린다. 적에게 잡혀간 누이동생을 찾아 나선 오라버니의 용감무쌍한 활약상이 영화의 초점이다. 

역사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허구적으로 그려진다. 화려한 의관으로 장식한 도르곤이 대표적이다. 육량시의 쥬신타와 조선신궁 남이는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조상들이 아무리 무기력 했기로서니 그렇게 일방적으로야 당했겠느냐는 애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상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사람들이 남이와 서군 같은 영웅이다.

그들의 영웅성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바쳐진다. 누이를 지키려는 남이나 자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는 서군이나 맥락은 동일하다. 따라서 영화는 17세기 조선이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관점을 보여준다. "백성을 버린 임금은 임금이 아니다"라거나 "왕이 바뀌거나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공부할 의미가 없다"는 남이의 말에도 그것은 드러난다.

 신분과 남녀를 막론하고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개돼지처럼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음을 영화는 자막으로 알려준다. 너무도 처절하고 비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우울하고 구슬픈 대목에 <최종병기 활>은 조금 치장을 해준 것이다. 영화는 무겁고 어려운 역사는 모두 버리고 재미 하나에 집중한다. 전략은 딱 들어맞았다. 

역사 의식과 재미의 공존은 불가능한가 


영화 '최종 병기 활'


<최종병기 활>은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철저하게 할리우드 방식을 따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결론을 향해 치달아간다. 그래서 미국영화 공식에 익숙한 한국관객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 가족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주제나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 총잡이들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서부영화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런데 관객들의 표정이 흐뭇하다. 언제 두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름 날리는 배우들과 잘 짜인 각본, 뛰어난 음향효과와 속도감 넘치는 구성 그리고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활의 경연까지. 재미와 흥행을 위한 공식을 두루 갖춘 영화가 <최종병기 활>이다. 기막힌 대사 하나 없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만. 12세 관람가로 개봉된 영화이기에 객석에는 어린 관객들도 많다. 재미에만 치중하면 역사의 진실이 흐려질 수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역사가 영원히 과거의 일로 되려면 어린이들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활>에는 역사가 아니라 재미와 속도와 할리우드 액션이 그득하다. 그 둘 다 쫓는 건 불가능한가!





※ 오마이뉴스 8월 16일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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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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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만명은 왜 하필 그 기간에 죽었을까
[리뷰] 장훈 감독의 신작 영화 <고지전>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영화 <고지전>이 개봉 열사흘 만에 178만 관객을 넘어섰다. <고지전>과 같은 날 개봉한 <퀵>은 158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두 편의 한국영화가 지난 주말 흥행을 이끌었다.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3>(763만)과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375만)의 아성을 뚫고 한국영화가 선전 중이다. 여기에 만화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가세하고 있다.

장훈 감독은 2008년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해 신인감독상과 2009년 '대종상영화제' 시나리오 부문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떠올랐다. 그는 김기덕 감독의 <빈집>과 <활>의 연출부와 <시간>의 조감독을 거치면서 실력을 다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영화다> 이후 2년 만에 연출한 <의형제>가 크게 성공하며 흥행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 '고지전' 포스터 ⓒ TPS컴퍼니


<고지전>이 평단이나 관객의 호평을 받는 데에는 시나리오 덕택이다. 장편소설 <DMZ>와 텔레비전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유명한 박상연 작가가 <고지전>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는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시나리오를 나현 작가와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고지전> 이전의 한국전쟁 영화

1964년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는 1952년 겨울 '강릉전투비행단'이 영화의 시간·공간적 배경이다. 영화는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히려 빨간 머플러로 상징되는 공군장교들의 멋과 남성다움, 낭만과 사랑을 전면에 배치한다. '한국전쟁'을 더러운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일부 나오지만 그것은 눈 밝은 관객만의 몫이다.

1965년 김기덕의 <남과 북>도 <빨간 마후라>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자유와 사랑을 위해 총질하는" 정보참모나, 개인적인 비극에 함몰된 인물들의 시각은 매우 좁다. 1984년 개작된 김기의 <남과 북>은 매우 폭력적이다. 미국이 만주를 폭격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남북통일이 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깔려 있는 승리지상주의가 두드러진다.

 정지영의 영화 <남부군>(1990)은 이태의 동명원작에 근거한다. 영화에서 전쟁은 반경 15킬로미터 지리산에 갇힌 남부군 병사들의 삶을 향한 본능만 남은 전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왜 남과 북이 갈라서고, 왜 남과 북이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지 사유한다. 그런 궁극적인 원인은 외세로 드러나지만, 외세에 밀려버린 무력한 민족에 대한 성찰은 없다.

<실미도>와 함께 천만관객 시대를 개막한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21세기에 처음 조명하는 한국전쟁 영화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사유가 부족하다. '보도연맹사건'이 영화 속에 도입되지만 그것은 삽화 정도로 처리됨으로써 전쟁의 대규모 참상과 비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장'영화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시작해 1953년 7월에 끝났다는 건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기록은 1951년 1.4후퇴와 휴전협정으로 끝난다. 2년 2개월간의 기나긴 휴전협정 중 어마어마한 공방전이 있었다. 백마고지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없다. '한국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고지전>은 그것의 끝 이야기이다."

영화 '고지전' 장면 ⓒ TPS컴퍼니

 박상연 작가의 말이다. 위에 제시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영웅주의, 낭만성, 가족주의 등이다. 외세개입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는 끝내 진행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가운데 '이거다!' 하고 내세울 영화가 없는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2005)의 빛나는 희극성과 유쾌한 남북공존 그리고 짤막한 화해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고지전>은 이런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전쟁을 들여다보는 시나리오 작가와 그것을 영화화한 감독의 시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1·4후퇴 전까지 사망자는 100만이었으나,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기간에 사망한 사람은 300만에 달한다. 이것은 1951년 6월에 전선이 교착된 후 38선 부근의 중부전선에서 그만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지전 자체를 잘 보여주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한국전쟁에 대해선 다 알고 있는 것 아니야?' 하는 선입견이 사라졌다. 기존 전쟁영화와 차이점은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장영화라는 것이다. 실제 전쟁터에 들어선 것 같은 생생함, 그저 볼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그때 그곳의 상황이 관객에게 공감을 안겨주는 영화이길 바란다."

장훈 감독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고지전>은 싸움에 초점을 맞춘 '전쟁영화'가 아니라, 싸움터에 방점을 둔 '전장영화'다. 왜 그들은 그토록 치열하게 '땅'을 두고 싸웠는가. 그리하여 그것이 오늘날 던져주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고지전>의 관전 포인트다.
 

영화를 지탱하는 두 축, 은표와 수혁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은표와 수혁이 인민군 중대장에게 호되게 당한다.

"너희들이 왜 전쟁이 지는 줄 알아. 왜 싸우는지 몰라서 그런 거야. 이 전쟁, 딱 일주일이면 끝난다. 그때 공화국에 쓸모가 있을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겠어."

개전초기 의정부 전선에서 있은 일이다. 하지만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삼 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다. 은표와 수혁은 그날 이후 헤어져 생사를 모른 채 삼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방첩대 중위 은표는 휴전회담 업무를 보다가 과도한(?) 민족주의적 발언 때문에 동부전선으로 밀려난다. 거기서 우연처럼 조우하는 은표와 수혁.

<고지전>은 이 지점부터 전쟁과 인간, 죽음의 공포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현저한 차이를 축으로 진행된다. 은표는 모든 것을 논리와 군법,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반면에 수혁은 대담한 배포와 실행력, 논리 이전의 직관과 인간중심의 열린 시각으로 세상과 관계를 본다. 그들의 시선을 합하면 6·25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잡힌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왜 남과 북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했는지.

전쟁의 와중에서 수혁과 '이초'의 연정이 움튼다. 아군을 암살하는 뛰어난 저격수 태경의 별명은 이초다. 사람이 총에 맞은 다음 2초가 지나서야 총성이 들린다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수혁은 그런 태경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아군과 북한군이 만나는 장면에서 은표는 수혁이 가지고 있던 태경의 사진을 전달한다. 전장에 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니!

 

영화 '고지전' 포스터 ⓒ TPS컴퍼니

 
7월 27일, 마지막 열두 시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애록고지'에서 대치하던 은표와 수혁의 악어부대원들과 현정윤이 이끄는 북한군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그들은 처절하고 지긋지긋한 전장을 떠나 부모형제,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날들이었는가. 하지만 휴전협정은 12시간 뒤에 발효된다.

영화는 안개 자욱한 애록고지를 보여준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린다. <전선야곡>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호가 노랫말을 짓고, 박시춘이 곡을 만들고, 신세영이 불렀던 불후의 명곡 <전선야곡>.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쪽은 아군이 아니라 북한 인민군이다. 노래는 놀라운 파급력을 가진다. 남과 북의 병사들이 하나가 되어 <전선야곡>을 부른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1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2절)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면 그들은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 허옇게 머리가 센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열두 시간이 그냥 흘러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흘러가고, 안개는 바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끝도 없이 죽고 또 죽어나간다. 생사의 기로에서 정윤이 은표에게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분명히 알았더랬어. 왜 우리가 싸우는지 말이야. 근데 하도 오래 싸우다보니까 왜 싸우는지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지."


영화가 남긴 '육중한' 문제들
 
우리는 숱한 전쟁영화를 보았다. 태초 이래 인간이 싸우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면 그것을 기억하는 기막힌 영화가 제작되었다. 가까이는 월남전을 다룬 <디어 헌터>(1978), <지옥의 묵시록>(1979, 2001), <플래툰>(1986)과 이라크 전쟁을 다룬 <엘라의 계곡>(2007), <하트 로커>(2008), <그린 존>(2010)까지.

영화가 전쟁을 반추하는 것은 전쟁이 가져온 치명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숱한 인명을 살상한다.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때로 아군이 되기도 한다. <고지전>에서 이것은 1950년 8월 포항전투에서 살아남은 '악어부대' 병사들의 처절한 기억으로 낱낱이 그려진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휴전협정 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진영과 중국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이 대거 참전한 한국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일종의 세계대전이었다. 적어도 우리는 왜 그렇게 죽도록 싸웠는지 그 까닭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전쟁을 쉬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서로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신님들의 넋을 기리는 진정한 길이기도 하니까.




※ 8월 3일 오마이뉴스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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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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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모들이 알콩달콩 커나가는 이야기
[리뷰] 대담한 신인감독의 묵직한 신작영화 <소중한 날들의 꿈>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장편 만화영화 <소중한 날의 꿈>은 맑은 바닷물처럼 투명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옥색인 바닷물은 다가가서 보면 속살을 하얗게 드러내곤 한다.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의 합창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시각. 그런 순간에도 시계추는 쉬지 않고 운동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운동만을 되풀이하는 시간. 

나는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시절의 추억이 파도처럼 줄지어 왔다가 차례로 사라져갔다. 모든 사라져간 것은 언제나 아름답게 추억되는 법이다. 아무리 괴롭고 아팠던 일이라 해도 시간의 치유력 앞에서는 일순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망각의 늪 속에 묻혀있던 옛일들이 무리지어 주위를 떠돈 까닭은.  

언젠가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웃음 짓거나 한숨 쉬는 때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이 영영 멀어져간 시간과 공간과 거기서 맺어진 인연의 얼굴들이 무작정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사람과 사건과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이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준다.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영원으로 승화하는 힘이 드러난다. 

소중한 날의 꿈 홈페이지


이랑과 수민 

천안에 있는 '아우내' 고등학교에 수민이 전학 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수민. 예쁘고 하얀 얼굴에 자기주장이 강한 수민. 옛날에는 드물었던 남녀공학에서 수민은 모든 남학생들의 우상이 된다. 신발장에까지 연애편지와 장미를 가져다놓는 애틋한 마음들로 수민은 언제나 환하게 빛난다. 교복마저 맞춤하게 입고 다니는 수민이 이랑은 부럽다. 

오이랑은 달리기를 잘한다. 학교 대표선수이기도 한 이랑이지만 어느 날 경기에서 2등으로 밀려난다. 달리기에서 누군가에게 진 기억이 없는 이랑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무잡잡하고 오이처럼 길쭉한 이랑은 교복이 맞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트집을 잡는다. 교복은 1학년 때는 크고, 2학년 때는 맞고 3학년 때는 작아진다고 엄마는 말한다. 

이랑과 수민은 단짝이 되어 학교 안팎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의 시낭송회가 인상적이다. 고풍스러운 시조를 낭송하는 이랑과 달리 수민은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그럴싸하게 읽어내려 간다. 시커먼 남학생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리에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노란 숲속에 나있는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던 늙은 시인의 애틋한 회상.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철수와 이랑 

철수는 손수 만든 비행기로 학교 옥상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과학도지만 어리버리하고 꺼벙하다. 친구들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철수를 수민이 쪽으로 밀친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철수를 친구들이 놀려댄다. 철수는 삼촌이 경영하는 전파상에서 이것저것 고치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곳으로 이랑이 라디오를 들고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시절의 수줍던 첫사랑 장면을 본다. 열여덟 살 난 고교 2학년 청춘의 가슴 떨리는 교감의 순간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소중한 날의 꿈>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단순화와 속도감, 재패니메이션의 환상적인 장면처리나 질감과 다르다. 실사에 가깝되 한국의 영혼과 정서가 묻어나오도록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철수는 부모가 아니라 삼촌과 살고 있다. 삼촌은 사고로 청력을 잃어버려 수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철수는 이랑을 데리고 그들의 아지트를 보여준다. 폐물이 된 비행기까지 들여다 놓은 과학과 공학의 전시장. 거기서 철수가 들려주는 해남의 공룡 발자국 이야기는 이랑의 호기심을 한껏 부풀린다. 그 많던 공룡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갈대가 우거진 '땅끝마을' 어디선가 철수가 마침내 공룡 발자국을 찾아낸다. 맑은 물이 고여 있는 발자국에는 하늘과 구름이 비쳐 보이고, 바람도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연초록 공룡 하나가 다른 공룡들보다 뒤처져서 가고 있다. 이랑은 초록 공룡이 안타깝다. '달려라, 달려!'를 외치는 이랑. 드디어 초록 공룡도 힘을 내서 무리를 따라잡는다.   

독특한 서사구조 

소중한 날의 꿈 홈페이지


관객은 <소중한 날의 꿈>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나 갈등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나 방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철수와 이랑의 뜨뜻미지근한 연애 이야기, 조숙한 수민의 짧은 설렘과 좌절, 아파트 건설로 인한 아지트의 철거와 이사. 그리고 3학년으로 올라가는 이랑과 수민의 담담한 속내. 그런 식이다. 시간과 공간도 느슨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모노노케 히메> 같은 미야자키 하야오 방식의 기막힌 서사구조나 요즘 상영되는 <쿵푸팬더 2>의 사건 중심 서술과 판이하게 다르다. 밀도와 속도감에서 <소중한 날의 꿈>은 여느 만화영화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저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20세기의 시간과 공간의 잔잔한 이야기를 헐겁게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난 세기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다시 아날로그를 거쳐 디지털로 전환된 것처럼 트랜지스터의 시간대를 과장하지 않고 그려낼 따름이다. 따라서 영화의 사건이나 인물, 시간과 공간은 넉넉하게 상호 침투하면서 느릿하게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하나 서두를 것도 없고, 초조하거나 괴로울 것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소중한 날의 꿈>을 보면서 기시감(데자뷔)이 든 것은 나만의 일일까. <써니>의 1985년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600만 관객을 향해 쾌속순항 중인 <써니>에 나오는 일곱 여학생들의 이모격인 인물들이 이랑과 수민이다. 그런데 <써니>의 시간과 공간이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반면에 <소중한 날의 꿈>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해남 땅끝마을의 공룡 발자국을 보려고 철수와 이랑은 열차를 탄다. 그들은 서울역에서 아슬아슬하게 열차를 타고 해남으로 떠나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남을 가려면 천안에서 굳이 서울로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천안에서 호남선을 타면 서대전 경유하여 목포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땅끝마을로 가면 그만이다. 왜 서울로 가야했을까. 

시간은 더 뒤얽혀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을 알리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인간이 달에 도착한 그때 나에겐 그 아이가 찾아왔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다. 따라서 영화의 그때는 1969년이다. <러브 스토리>가 상영되는 영화관에서 이랑이 훌쩍거린다. 수민은 그런 이랑을 언짢은 눈으로 바라본다. 1970년의 일이다. 

영화 속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는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여로>다. 장욱제, 태현실, 박주아 등이 출연하여 국민들의 애를 태웠던 <여로>는 1972년에 방영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보이저 1호' 소식에 철수는 몹시 흥분하며 열광한다. 보이저 1호는 1977년에 발사되었고, 1979년에 목성을, 그 이듬해에 토성을 지나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별들의 고향> 간판도 그렇다. 이장호 감독이 연출하고 안인숙과 신성일이 주역을 맡은 <별들의 고향>은 평균관객 5만 시대에 46만 관객을 불러 모아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1974년의 일이었다. <소중한 날의 꿈>은 어느 해 봄에 시작되어 그 해 겨울에 끝난다. 하지만 그 안에는 10년 남짓한 시간이 공존한다. 이를 어쩔 것인가. 

글을 마치면서

 영화를 보고 나서 자리를 이내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몇몇은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있다. 젊은 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다. 속도와 경쟁에 익숙한 세대가 지난 세기의 작은 이야기와 사건과 사람을 다룬 만화영화에 대응하는 양상이 흐뭇하다. 화면에는 작화에 참여한 인원이 서른아홉명이라고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다. 

작품에 들어간 그림이 10만장, 거기 소요된 세월이 11년이라고 한다. 그 시간의 두께와 작업량과 참가인원을 다시 생각한다. 그들의 노고와 열정과 열망이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기막힌 화면과 숨이 멈출 듯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꿈을 꾼다. 저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간 지난 세기의 어린 주인공들을 새삼 떠올린다.  

세월과 시간의 견고하고 두꺼운 덮개를 뚫고 다시 살아난 그들의 빛나는 얼굴과 꿈과 사랑을 찬미한다. 모든 지나간 것들에게 보내는 예찬과 감탄을 뒤로 하고 나직하게 묻는다. 나의 빛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꿈은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언젠가 나는 그토록 찬연했던 시절과 가지 않은 길과 꿈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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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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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뉴스> 속 뉴스,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리뷰] 대담한 신인감독의 묵직한 신작영화 <모비딕>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신인감독 박인제의 장편영화 <모비딕>이 조용하게 상영되고 있다. 우리에게 낯선 풋내기 감독이 정치권력과 언론, 민간인사찰 같은 문제를 소재로 묵직한 영화를 선보였다. <모비딕>은 신문기자를 전면에 내세워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강력하고 은밀한 권력기관의 '음모론'을 파헤친다. 영화 관련 언론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모론이라는 게 풀리지 않은, 사건의 결말이 나지 않은 어떤 것을 뜻한다면, 결국 모든 영화의 출발점은 음모론 아닌가? <모비딕>은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뤘을 뿐이다. 이것은 진실과 사실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감독이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업에만 6~7년의 정성을 쏟았다면서 그는 <모비딕>이 어려운 영화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제목에 고개 젓는 관객도 적잖다. 1851년 출간된 허만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딕 (백경)>을 읽은 관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한 흰 고래와 사투를 벌이는 외다리 선장 에이 허브의 배짱과 뚝심은 영화 <모비딕>의 기자와 닮았다. 

출처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모비딕 포스터


기자의 책무 

사내가 깊은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정장에 노타이 차림인데 얼굴에 핏기가 별로 없다. 희끄무레한 어떤 거대한 물체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 엄청난 크기의 회색빛 모비딕이다. 까칠까칠한 피부에 기다란 털이 빳빳해 보인다. 몸체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고래를 가늠하려고 애쓰는 사내.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사내가 가까스로 눈을 뜬다. 

모비딕을 본 사내는 <명인일보> 사회부 이방우 기자다. 그는 '발암교 폭발사고'와 더불어 '민간인사찰'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 노심초사하고 있다. 컴퓨터 디스켓의 비밀번호를 찾아야 하는 그가 피로에 지쳐 잠깐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동료기자 손진기로 꽉 차있다. '발암교 사건'을 취재하다 비명횡사한 손진기.

이 지점부터 영화는 관객에게 기자의 사회적 의미와 존립근거를 여러 차례 묻는다. 사전에 따르면 기자는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대중매체에 필요한 글을 쓰거나 편집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는 자를 기자라고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기자는 일차적으로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모비딕>에서 우리는 이 같은 기자의 정의와 전혀 다른 기자를 만난다. 그것이 신인감독 박인제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는 발생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쓰는 것을 넘어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까지도 기자의 책무로 생각한다. 따라서 <모비딕>의 기자는 추리력, 순발력, 행동력 모두를 겸비한 형사처럼 보인다.    

언론과 권력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에 그런 기자들이 있기는 한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기자들이 대체 얼마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에. 그래서다. <모비딕>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다가온 까닭은. 영화는 권력을 향한 언론의 상반된 두 얼굴을 낱낱이 보여준다. 

권력에 아부하고 기생하면서 권력의 비호 아래 기득권을 누리는 언론의 어둡고 야비한 얼굴. 반면에 이방우와 손진기, 그리고 야무진 여기자 성효관이 보여주는 진실을 향한 열렬하고도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얼굴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전자에는 <명인일보> 국장 같은 최고위급 간부가 포섭되어 있으며, 후자에는 중견과 신참기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모비딕>은 양자의 대립과 충돌을 보여주면서 후자의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인간다움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지방에서 스카우트된 손진기의 통찰은 무척 놀랍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정부 위의 정부'라는 대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최고 국가기관인 정부 위에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정부가 있다는 말은 얼마나 놀라운가.

<모비딕>에서 사태의 핵심은 '정부 위의 정부'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다채로운 시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거대한 권력기관의 조직은 착착 굴러간다. 그런 과정에서 힘도 돈도 연줄도 없는 선량한 민간인들이 거대 공권력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권력기관과 민간인사찰

출처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모비딕 포스터

우리는 '보안사' (현 '기무사')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을 기억한다. 1990년 10월 4일 윤석양은 보안사 탈영 때 가지고 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과 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 4인에 대한 개인 신상카드, 동향파악 내용이 들어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을 공개했다. 권력기관의 대규모 민간인사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민간인사찰 문제는 <모비딕>에서 '발암교 사건'과 더불어 기자들이 파헤쳐 나가는 실체적 진실의 토대를 이룬다. '정부 위의 정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두고 고뇌하던 이방우는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수록 전율과 공포를 경험한다. 그는 자신을 끝없이 도청하고 미행하면서 폭력도 불사하지 않는 어둠의 세력을 향해 절규하듯 목 놓아 소리친다.

"너희들은 사람 잘못 골랐다. 너희들이 누구든 간에 끝까지 너희들의 정체를 밝혀서 낱낱이 씹어주마. 기자가 나 혼자도 아니고 어디 끝까지 해보자!"

정상적인 지식인이자 기록자로서 이방우는 권력기관의 테러조작과 민간인사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권력자들의 어둡고 음습한 욕망의 실체를 마지막까지 까발리려는 것이다. 최종적인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생될 수도 있음을 간파하지만 이방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살인과 예술 사이

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원자력 발전소 옆으로 두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장 선생'과 '어르신'이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까지 좌지우지하는 장 선생과 그의 최종 결재권자인 어르신이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긴다. 그들 논지의 핵심은 단순 명쾌하다. 정치의 요체는 예술과 같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백 명을 죽여 백만 명을 살리면 그것은 예술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논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영속적인 권력을 위해 그들은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에게 가하는 무한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한다. 전체를 위해서라면 몇몇 이름 없는 소수자들은 병신이 되거나 죽어나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간인사찰 같은 범죄행위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백주대낮에 해치우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의식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권력자들과 권력집단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소수자에게 행해지는 조직적인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반값등록금'을 위한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에게 가해진 인권침해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인권이 보장되었다는 소식은 여태 들은 바 없다.

<모비딕>에는 잘 만들어진 장면이 있다. 장 선생이 검찰총장과 '발암교 폭발사건'을 테러사건으로 조작하는 장면이다. 있지도 않은 유서를 조작하고,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가고, 전국적인 동요와 불안을 야기함으로써 공권력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전략. 그런 배경에는 살인과 예술의 차이에 기초한 정치공학 논리가 작동한다.

글을 마치면서

우리가 보고 듣는 소식이 진실한지 영화는 묻는다. 매일 접하는 사건이 진실에 기초한 사실인지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날카롭고 세심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성찰하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권력기관과 권력자들이 벌이는 체스게임의 말은 아닌지 의심해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그런 통찰이야말로 국민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비딕>에도 몇 가지 옥에 티가 있다. 성효관 기자의 바지가 '모비딕 카페'에 잠입할 때 치마로 뒤바뀌는 점, 쓰레기통에 담겨 있던 쓰레기가 시간과 더불어 그 양이 현저히 줄어든 점, 윤혁의 양심선언이 아침 8시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사실성의 부족은 봉준호 같은 뛰어난 감독에게 배웠으면 한다. 

신인이지만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치열함, 사실성에 토대를 둔 상황설정 등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한국영화에 취약한 '음모론' 장르에 도전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다. 작년에 있은 '천안함 폭발사건'을 둘러싼 논쟁과 총체적 진실규명을 위한 다각적인 시도가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박인제 감독의 정진과 분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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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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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수>의 무임승차, 그게 가장 불편하다
경쟁 강요하는 경연방식... 즐겁게 <나가수>와 함께 하는 방법은 없을까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요즘 <나는 가수다>(아래 나가수)가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 공식 음악차트인 '가온차트'는 "3월 1일부터 5월 28일까지 국내 주요 음악 사이트에서 판매된 <나가수> 관련음원 다운로드를 조사한 결과 2398만 9471건으로 나타났다"고 지난 7일 밝혔다.

 김범수의 <제발>은 209만 6621건으로 최고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2위는 임재범의 <너를 위해>(110만 779건)가 차지했다. 윤도현의 <나 항상 그대를>이 108만 9929건,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107만 4155건, 백지영의 <약속>이 104만 4065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하면서 1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일간지와 포털사이트에는 지난 일요일 <나가수> 시청률이 예상 외로 저조했음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논쟁이 한창이다. 그만큼 <나가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는 반증이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 7명이 나와서 노래대결을 벌이는 단순한 오락 프로그램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MBC <나는 가수다> 

 

<나가수>가 뜨는 까닭은 

가수는 '훈련을 받고 전문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전문적인 직업인이란 얘기다. 따라서 가수의 생명은 노래 잘하는 데 있다. 어설프거나 설익은 노래를 들고 무대에 서는 사람을 가수라 부를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노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얼굴과 몸매와 춤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본업인 노래가 아니라, 부차적인 것들로 승부하는 가수 아닌 가수가 대거 등장하게 되었던 터다. 여기서부터 대중가요의 위기, 음반판매의 부진,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의 시청률 하락 같은 전반적인 문제가 나타났다.

 이런 시점에 <나가수>의 등장은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다.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출현하여 자신의 이름과 경력과 명예를 걸고 노래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사실 <나가수> 구성원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소라, 박정현, 윤도현, 김범수 등등.  

여기에 중도하차한 정엽과 김연우 등도 무시할 수 없는 가창력의 소유자 아니었던가. 더욱이 임재범이 합류하면서 <나가수>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그러다가 임재범의 하차와 옥주현, 김동욱의 합류로 시청률이 다소 하락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다.  


<나가수>의 관전 포인트

<나가수>의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는 '경연'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객석에 앉아있는 500명의 평가단이 어떤 판단과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가수 개개인의 성적과 순위가 매겨지고, 그것에 기초하여 생존자와 탈락자가 생겨난다. 달리 말하면 <나가수>는 아주 처절한 '서바이벌 게임'인 셈이다.  

내가 살려면 그대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살면 내가 죽어야 하는 비정한 생존게임이 <나가수>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극한적인 생존경쟁에 내몰린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다. 유명 연예인의 신상털기나 하고, 옛날에 어쨌다는 둥 흘러간 잡소리와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네 마네, 하는 식의 시시콜콜한 뒷얘기로 덧칠된 허접한 연예계 이야기에 식상해왔다. 

그러다보니 요즘엔 뉴스시간에도 연예인들의 근황에 대한 자질구레한 보도가 정식 뉴스의 하나로 방송되는 실정이다. 어처구니없는 세태다. 어쩌자고 황금시간대에 그들의 사생활을 이리저리 캐대는 황색언론의 틈바구니에서 살게 되었는가, 우울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가수>는 경연 현장의 청중과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욕구를 정면으로 충족시키고자 한 본격적인 가요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이의제기나 불만도 없어야 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실상이 문제다.  


<나가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무리한 경연방식이 문제다. 지금 <나가수>는 3주에 2회 경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경연에 참가하는 가수들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는 얘기다. <나가수> 말고도 나름의 생활이 있건만 가수들은 끝없는 경연에 내몰리고 있다. 몸 상태가 안 좋아도 방송은 진행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여유롭다고 말하는 가수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의 노래가 좋으려면 그들의 심신이 건강하고 자신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누구 말에 따르면, "내가 노래방에서 해봐서 아는데" 건강상태가 좋아야 노래도 잘 되는 법이다. 

둘째, <나가수>의 불편함은 무한경쟁을 일요일 오후시간에도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및 언론권력의 화두는 '경쟁'이다. 경쟁에서 시작하여 경쟁으로 끝나는 무한경쟁의 원칙이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최후의 승자만이 기억되고 축하받는 추악한 사회 대한민국. 꼴찌에게 격려와 위로의 박수가 아니라, 손가락질과 왕따의 저주를 퍼붓는 저급하고 속악한 나라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것에 서열과 순위를 매기고 그것에 따라 인간 개개인을 평가하는 가혹한 격투기의 나라 대한민국.  

거기 무임승차한 프로그램이 <나가수>다. 우리가 그들의 노래를 듣는 이유가 경쟁을 통한 7위 떨어뜨리기는 아닐 것이다. 정말로 노래 잘하는 가수들의 다채로운 노래 한마당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지, 새삼 생각해봤으면 한다. 

셋째, 시청률 문제다. 경연이 없으면 시청률이 떨어지고, 시청률이 떨어지면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고, 그러다보면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디와 방송사는 시청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우리 사회의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다. '될성부른 놈 몰아주자'는 선택과 집중이 낳은 비이성적인 재벌신화에 우리는 여전히 환상을 가진다.  

삼성의 사외이사에게 연말에 떨어진다는 수십억 원의 스톡옵션이 머잖아 내게도 올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것이 나의 세금에서 비롯된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서 지나치게 적은 법인세와 기업 '프렌들리'를 내세운 현 정부의 과도한 환율방어에 힘입은 수출신장과 수익증진이 재벌기업 삼성에게 가져다주는 거액의 스톡옵션이 결국 내주머니 돈에서 나온 세금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그리고 환호작약한다. 마치 삼성의 승리가 내 것인 것처럼 "삼성 만세!"를 목 놓아 외쳐댄다. 아아! 

넷째, 정말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가수들도 나올까, 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취향과 희망사항은 천차만별이다. 그것을 어떤 잣대로 평가하고 가수들을 선별하는지, 그런 잣대가 보다 분명하고 입체적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우림'의 김윤아나 매력적인 목소리의 나윤선, 우리나라의 휘트니 휴스턴 신효범, 진정한 뮤지션 조용필과 우리의 영원한 누님 심수봉을 보고 싶다. 과연 누가 우리시대의 진정한 가수인가. 그런 기준을 확고하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나가수>가 진정한 장수 프로그램이자 우리의 막힌 울화를 통쾌하게 뚫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MBC <나는 가수다> 


글을 마치면서

 <나가수>는 볼 만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볼 만하다. 그래서 아직 나는 <나가수>를 본다. 나처럼 가요 프로그램과 담 쌓은 지 수십 년 경력을 가진 사람을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 모으는 <나가수>의 거듭되는 진화를 바란다.  

무한경쟁과 과도한 긴장, 탈락에 대한 공포와 청중반응에 대한 예민한 반응 따위가 가수의 진짜 실력을 반감해 버릴 수 있다. 더욱이 유명세를 탄 음원의 곡이나 유명가수의 히트곡이 얻어 걸릴 경우 이것은 거의 행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가수'의 본질은 자신의 노래와 대중의 반향에 있는 것이 아닌가.   

고도의 충격요법과 속도감 있는 진행, 아슬아슬한 서바이벌 방식 등으로 시청률을 올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의 본질에 맞는 편안하고 즐거운 노래 한마당이 되었으면 한다. 창밖에 여름의 녹음이 한창이다. 곧 자연의 가수, 매미와 베짱이가 여름을 목 놓아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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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 이 글은 <대구여성회> 6월호에 수정ㆍ축소되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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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pelletjes 2011/09/14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음악♥

  2. putas sao paulo 2011/12/23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난 그냥이 게시물에 여기 당신이 가진 위대한 정보에 대한 큰 엄지손가락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빨리 귀하의 블로그에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