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모들이 알콩달콩 커나가는 이야기
[리뷰] 대담한 신인감독의 묵직한 신작영화 <소중한 날들의 꿈>


2011년 4월부터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의 영화리뷰 및 서평을
참언론대구시민연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김규종 |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장편 만화영화 <소중한 날의 꿈>은 맑은 바닷물처럼 투명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옥색인 바닷물은 다가가서 보면 속살을 하얗게 드러내곤 한다.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의 합창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시각. 그런 순간에도 시계추는 쉬지 않고 운동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운동만을 되풀이하는 시간. 

나는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시절의 추억이 파도처럼 줄지어 왔다가 차례로 사라져갔다. 모든 사라져간 것은 언제나 아름답게 추억되는 법이다. 아무리 괴롭고 아팠던 일이라 해도 시간의 치유력 앞에서는 일순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망각의 늪 속에 묻혀있던 옛일들이 무리지어 주위를 떠돈 까닭은.  

언젠가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웃음 짓거나 한숨 쉬는 때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이 영영 멀어져간 시간과 공간과 거기서 맺어진 인연의 얼굴들이 무작정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사람과 사건과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이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준다.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영원으로 승화하는 힘이 드러난다. 

소중한 날의 꿈 홈페이지


이랑과 수민 

천안에 있는 '아우내' 고등학교에 수민이 전학 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수민. 예쁘고 하얀 얼굴에 자기주장이 강한 수민. 옛날에는 드물었던 남녀공학에서 수민은 모든 남학생들의 우상이 된다. 신발장에까지 연애편지와 장미를 가져다놓는 애틋한 마음들로 수민은 언제나 환하게 빛난다. 교복마저 맞춤하게 입고 다니는 수민이 이랑은 부럽다. 

오이랑은 달리기를 잘한다. 학교 대표선수이기도 한 이랑이지만 어느 날 경기에서 2등으로 밀려난다. 달리기에서 누군가에게 진 기억이 없는 이랑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무잡잡하고 오이처럼 길쭉한 이랑은 교복이 맞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트집을 잡는다. 교복은 1학년 때는 크고, 2학년 때는 맞고 3학년 때는 작아진다고 엄마는 말한다. 

이랑과 수민은 단짝이 되어 학교 안팎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의 시낭송회가 인상적이다. 고풍스러운 시조를 낭송하는 이랑과 달리 수민은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그럴싸하게 읽어내려 간다. 시커먼 남학생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리에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노란 숲속에 나있는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던 늙은 시인의 애틋한 회상.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철수와 이랑 

철수는 손수 만든 비행기로 학교 옥상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과학도지만 어리버리하고 꺼벙하다. 친구들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철수를 수민이 쪽으로 밀친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철수를 친구들이 놀려댄다. 철수는 삼촌이 경영하는 전파상에서 이것저것 고치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곳으로 이랑이 라디오를 들고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시절의 수줍던 첫사랑 장면을 본다. 열여덟 살 난 고교 2학년 청춘의 가슴 떨리는 교감의 순간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소중한 날의 꿈>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단순화와 속도감, 재패니메이션의 환상적인 장면처리나 질감과 다르다. 실사에 가깝되 한국의 영혼과 정서가 묻어나오도록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철수는 부모가 아니라 삼촌과 살고 있다. 삼촌은 사고로 청력을 잃어버려 수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철수는 이랑을 데리고 그들의 아지트를 보여준다. 폐물이 된 비행기까지 들여다 놓은 과학과 공학의 전시장. 거기서 철수가 들려주는 해남의 공룡 발자국 이야기는 이랑의 호기심을 한껏 부풀린다. 그 많던 공룡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갈대가 우거진 '땅끝마을' 어디선가 철수가 마침내 공룡 발자국을 찾아낸다. 맑은 물이 고여 있는 발자국에는 하늘과 구름이 비쳐 보이고, 바람도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연초록 공룡 하나가 다른 공룡들보다 뒤처져서 가고 있다. 이랑은 초록 공룡이 안타깝다. '달려라, 달려!'를 외치는 이랑. 드디어 초록 공룡도 힘을 내서 무리를 따라잡는다.   

독특한 서사구조 

소중한 날의 꿈 홈페이지


관객은 <소중한 날의 꿈>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나 갈등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나 방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철수와 이랑의 뜨뜻미지근한 연애 이야기, 조숙한 수민의 짧은 설렘과 좌절, 아파트 건설로 인한 아지트의 철거와 이사. 그리고 3학년으로 올라가는 이랑과 수민의 담담한 속내. 그런 식이다. 시간과 공간도 느슨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모노노케 히메> 같은 미야자키 하야오 방식의 기막힌 서사구조나 요즘 상영되는 <쿵푸팬더 2>의 사건 중심 서술과 판이하게 다르다. 밀도와 속도감에서 <소중한 날의 꿈>은 여느 만화영화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저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20세기의 시간과 공간의 잔잔한 이야기를 헐겁게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난 세기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다시 아날로그를 거쳐 디지털로 전환된 것처럼 트랜지스터의 시간대를 과장하지 않고 그려낼 따름이다. 따라서 영화의 사건이나 인물, 시간과 공간은 넉넉하게 상호 침투하면서 느릿하게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하나 서두를 것도 없고, 초조하거나 괴로울 것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소중한 날의 꿈>을 보면서 기시감(데자뷔)이 든 것은 나만의 일일까. <써니>의 1985년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600만 관객을 향해 쾌속순항 중인 <써니>에 나오는 일곱 여학생들의 이모격인 인물들이 이랑과 수민이다. 그런데 <써니>의 시간과 공간이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반면에 <소중한 날의 꿈>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해남 땅끝마을의 공룡 발자국을 보려고 철수와 이랑은 열차를 탄다. 그들은 서울역에서 아슬아슬하게 열차를 타고 해남으로 떠나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남을 가려면 천안에서 굳이 서울로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천안에서 호남선을 타면 서대전 경유하여 목포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땅끝마을로 가면 그만이다. 왜 서울로 가야했을까. 

시간은 더 뒤얽혀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을 알리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인간이 달에 도착한 그때 나에겐 그 아이가 찾아왔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다. 따라서 영화의 그때는 1969년이다. <러브 스토리>가 상영되는 영화관에서 이랑이 훌쩍거린다. 수민은 그런 이랑을 언짢은 눈으로 바라본다. 1970년의 일이다. 

영화 속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는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여로>다. 장욱제, 태현실, 박주아 등이 출연하여 국민들의 애를 태웠던 <여로>는 1972년에 방영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보이저 1호' 소식에 철수는 몹시 흥분하며 열광한다. 보이저 1호는 1977년에 발사되었고, 1979년에 목성을, 그 이듬해에 토성을 지나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별들의 고향> 간판도 그렇다. 이장호 감독이 연출하고 안인숙과 신성일이 주역을 맡은 <별들의 고향>은 평균관객 5만 시대에 46만 관객을 불러 모아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1974년의 일이었다. <소중한 날의 꿈>은 어느 해 봄에 시작되어 그 해 겨울에 끝난다. 하지만 그 안에는 10년 남짓한 시간이 공존한다. 이를 어쩔 것인가. 

글을 마치면서

 영화를 보고 나서 자리를 이내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몇몇은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있다. 젊은 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다. 속도와 경쟁에 익숙한 세대가 지난 세기의 작은 이야기와 사건과 사람을 다룬 만화영화에 대응하는 양상이 흐뭇하다. 화면에는 작화에 참여한 인원이 서른아홉명이라고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다. 

작품에 들어간 그림이 10만장, 거기 소요된 세월이 11년이라고 한다. 그 시간의 두께와 작업량과 참가인원을 다시 생각한다. 그들의 노고와 열정과 열망이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기막힌 화면과 숨이 멈출 듯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꿈을 꾼다. 저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간 지난 세기의 어린 주인공들을 새삼 떠올린다.  

세월과 시간의 견고하고 두꺼운 덮개를 뚫고 다시 살아난 그들의 빛나는 얼굴과 꿈과 사랑을 찬미한다. 모든 지나간 것들에게 보내는 예찬과 감탄을 뒤로 하고 나직하게 묻는다. 나의 빛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꿈은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언젠가 나는 그토록 찬연했던 시절과 가지 않은 길과 꿈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 김규종 교수의 다른 글 더 보기

필자 소개
김규종 선생님은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내신 열혈 시네마 키드이시죠. 양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휘젓는 선생님은 민교협 활동도 활발히 하시면서 현재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club.cyworld.com/satira ■ 이메일 : gjkim@mail.knu.ac.kr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참언론대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arbra 2012/03/19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억로시작되는 새은어 순간이의기억으 잠시아픔이되고

  2. Link 2012/05/07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지 만들 놓은세공인은 합한 귀가 각나지않아 며칠을 고민하다가 혜롭기 문 로몬 왕자 찾아갔습니.세공인의 고민을 들은솔몬은 잠시생각하가다과같 어넣라고 하였습니다.